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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속에 오래 동안 모셔만 두었던 책을 숙제하는 기분으로 꺼내서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전세계에 유명한 작가로 인정받게 만든 책이며 그의 대표작이며 작가 자신의 생각과 성향을 그대로 책의 주인공에 담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는 책이다.


처음에는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변역되어 나왔고 그 이후 민음사에서 책 제목 그대로 "노르웨이의 숲" 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새롭게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서점에 가보면 민음사 버전의 "노르웨이의 숲"과 문학사상에서 여전히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책을 판매하고 있다. 독점 계약이 아니라 가능한 건지 그 내막은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제목 보다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오히려 더 어울리는 것 같고 역자가 원작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책을 한마디로 표현하여 제목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책의 첫 부분은 의례적으로 작가가 이 책을 누구에게 바친다는 표현을 넣는다. 주로 가족이 되거나 부모가 되거나 아주 절친한 친구 이름이 들어가는데 이 책에는 그러한 표현이 없이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수많은 축제를 위하여"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비교적 천천히 세심하게 읽어 나갔고 무의식적으로 넘긴 페이지는 다시 되돌아가서 읽었지만 "수많은 축제"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와닿지 않았다.

아마도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겪은 하나 하나의 일들이 축제일 수도 있고 그 주변 인물들이 겪은 일들 역시 축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은 즐거운 희극 보다는 비극적인 내용이 더 많으며 3명의 주변 친구들이 자살을 선택하였고 살아 있는 친구들 역시 그리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아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 하나 하나가 인생에 있어서 축제로 표현될 일인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전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책이 생각났다. 당시 그 책을 읽을 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으니 이전에 읽었던 책들의 장면이 떠오르며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책을 먼저 읽고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후회도 든다.


비록 성애적인 표현이 많이 나와고 남성 위주의 시선에서 1970년대 일본의 모습을 바라보며 18세에서 시작해 20세가 되면서 대학생이 겪는 이야기 치고는 너무 어른스러운 내용이 많았다. 다른 블로그 글들을 보니 이러한 표현 방식과 시선들 때문에 불쾌해하는 평과 다시 읽고 싶지 않다는 평도 많이 있다. 오히려 그러한 불편함을 작가가 의도하여 그 시대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책에는 많은 고전들이 소개되고 있다. 특히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 주인공이 심심할 때마다 꺼내서 읽는 책으로 묘사 되었고 주인공의 독서 습관이 최근에 나온 책은 읽지 않으며 최소 5년 이상은 지난 책만을 골라 읽는 것으로 미루어 마루카이 하루키의 독서에 대한 취향이나 다양함 그리고 음악적 감각 등 여러가지가 이 책을 통해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 책을 덮으면서 예전에 읽었던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도 생각났는데 마치 일본판 "호밀밭의 파수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느낌이 비슷했다.


여러가지 적고 싶은 내용들이 많이 있지만 더 추가적으로 기록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은 책이다.